천리포수목원은 2000년에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세계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됐습니다.
또 미국호랑가시학회가 공인한 호랑가시수목원으로 선정됐습니다.
미국호랑가시학회는 대저택이나 장원을 가진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배타적으로 운영하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가 미국 밖의 다른 나라 수목원에 인증패를 준 경우는 프랑스에 이어 천리포수목원이 두번째였습니다.
꿈과 열정으로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민병갈은 2001년에 임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 미군 중위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첫 7개월 동안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한국인의 순박한 모습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이듬해 군복을 벗고 한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한 끝에 미 군정청 정책고문관으로 지원해 이 땅에 남았죠.
천리포 땅과 인연을 맺고 1979년에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했습니다.
그는 2002년에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제가 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책에는 민병갈이 증권회사에서 일했고 큰손이었다는 얘기만 지나가듯 언급됐습니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 그가 주식투자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천리포수목원은 주식에서 번 돈으로 일구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국민투신(현재 프루덴셜자산운용) 최남철 펀드매니저는 1996년에 쌍용투자증권 국제영업부에서 전화를 받습니다.
"보유 주식하고 운용스타일이 당신과 비슷한 외국인이 있는데 점심을 함께 하면서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그는 젊고 스마트한 외국인을 상상했습니다. 나가보니 백발에 보청기를 낀 70대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우리말로 인사했죠.
이 노인이 민병갈이었습니다. 한국은행 에디터로 일하다가 쌍용투자증권 명동지점 2층에 방 한칸 얻어 전업투자자로 독립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나흘은 주식투자하고 사흘은 수목원을 가꾸며 지냈습니다.
최 펀드매니저와 그의 가족은 여름에 민병갈의 초청으로 천리포수목원에서 일주일을 보냅니다.
민병갈은 투자와 관련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온통 꽃 풀 나무 이야기만 들려주었습니다.
휴가 마치고 떠나는 최 펀드매니저에게 그가 딱 한마디를 당부합니다.
“미스터 초이, 주식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지 마세요.”
주식과 가까이 있으면 자주 들여다봅니다. 자주 보다보면 충동적 매매를 하게 됩니다.
칼 밀러는 괜찮은 주식을 골라 장기보유해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는 나무를 심고 수십년 동안 정성들여 가꾸는 마음으로 주식투자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50세, 꿈을 펼치기엔 결코 늦지않은 나이다>
그의 나이 50세 때였다. 삶의 목표를 잡은 것은. 조건은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좋은 조건이라면 일을 벌이기에 충분히 돈이 많았고 독신이어서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 있다는 등이었다.
나이가 많다면 많았다. 그는 열정으로 나이를 뛰어넘는다.
쉰 고개를 넘었지만 화장실에 갈 때에도 책을 놓지 않으며 놀라운 속도로 배워나갔다.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원로 식물학자 이창복 교수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40년간 교단생활을 하면서 그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기억력도 탁월해 학습 진도가 젊은 학생 이상으로 빨랐다.”
민병갈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1970년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는 소나무와 전나무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나무에 문외한이었다.
그는 그러나 한번 목표를 정하자 그 길로 매진한다. 여느 집념과는 사뭇 달랐다. 집념이라기보다 사랑이었다.
그는 나무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나무를 위해 수목원을 조성하는 데 남은 삶을 바쳤다.
기자가 90년 봄에 그를 처음 만나 인터뷰한다.
“돌아가시면 한국 땅에 묻히실 건가요? 평소에 미국 고향 펜실베이니아를 못 잊어 하시던데.”
“묻히더니요? 땅이 아까워요. 그럴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어야지요.”
“화장을 원하신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죠 그렇지만 뼈를 땅에 묻어도 안 돼요.”
“그러면 뼛가루가 천리포 앞바다에 뿌려지길 바라시겠네요”
“그것도 아까워요. 땅에 뿌려서 나무의 거름으로 써야지요.”
태안반도의 천리포는 수목원으로서 딱 맞는 입지는 아니었다. 해발 120m의 구릉은 민둥산이었다.
땅은 30㎝만 파도 소금 섞인 흙이 나오는 지독한 박토였다.
강수량이 연평균 1,000㎜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적었다. 바닷바람이 거세 새로 심은 나무를 뿌리째 흔들어놓기 일쑤였다.
수도도 전기도 없었다. 처음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나무에 줬다.
민병갈은 지하수를 끌어올릴 요량으로 발전기를 장만한다.
그러나 지하수 수맥을 찾는 데 실패한다. 그래서 그는 연못을 판다.
논이 있던 자리에 관개용 연못을 파면서 그는 그 이상의 용도도 마음 속에 두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흙무덤을 만들어 물가나 물속에서 잘 자라는 화초를 심었다.
얼마 후 갈대가 서서히 올라오더니 풍성한 숲을 이루었다. 연꽃, 수련, 마름이 둥둥 떠올랐다.
그 후 연못 주변은 다양한 버드나무와 습지식물이 자라는 명소가 됐다.
바닷바람은 해안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인 곰솔로 숲을 만들어 잠재운다.
이제 병풍을 쳐놓은 듯 천리포수목원을 감싸고 있는 곰솔들은 바닷바람이 거세지면 윙윙 소리를 내며 춤을 춘다.
만년의 민병갈은 석양 무렵이면 방품림의 오솔길을 산책하며 해안 정취를 즐기곤 했다.
바람의 장단과 가락에 몸을 맡기고 춤추는 곰솔들을 보는 것이 그에겐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물을 담고 바람을 막자 천리포는 더할 나위 없는 수목원 입지가 됐다.
나직한 구릉지는 풍부한 일조량을 받고 있었고 해풍을 타고 들어오는 끈적한 운무는 나무의 생장을 도왔다.
천리포는 또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의 지역보다 따뜻했다.
겨울철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적이 별로 없었다. 여름철에는 너무 덥지 않았다.
여름 최고 온도가 30도를 넘는 날은 며칠에 불과했다. 그래서 난대성부터 아한대성까지 폭넓은 식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
천리포수목원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1만300여 수종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천혜의 조건 덕분이었다.
시행착오가 없을 리 없었다. 72년부터 82년까지 11년간 그는 해외식물을 1만1,600여종 도입했다.
천리포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해 살아남은 것은 그 중의 절반도 안 됐다.
같은 위도에서 자라는 나무도 생장풍토가 다르면 적응을 못한다는 사실을 민병갈은 이 때 처음 알았다.
그는 온실을 늘렸다. 바다를 건넌 나무들은 기후에 따라 11개로 나뉘어진 온실에서 천리포 적응훈련을 거쳤다.
천리포와의 인연은 오래 묵은 뒤에야 싹을 틔웠다.
민병갈은 60년대에 직장 동료를 따라 자주 인근의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았다.
딸 혼수 비용을 걱정하는 노인의 사정을 듣고 돕는 셈 치고 6000평을 사들였다. 62년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수목원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차츰차츰 땅을 넓혀 3만평쯤 됐을 때
아담한 농원을 꿈꾸며 좋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러다 10만평 규모를 확보하면서 본격적인 수목원을 조성하기로 결심했다.
부지는 15년간 18만 평으로 넓어졌다.
그는 주중에는 서울의 증권사에 다녔고 금요일 오후부터는 천리포 나무 지킴이로 변신했다.
한국식물도감이 헤져 떨어질 정도로 식물 공부를 했고 언제나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나무를 돌보았다.
나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했고 마치 자식을 기르듯 종자를 채집해 온 정성을 들여 생명을 키워냈다.
그 결과 천리포수목원은 단 한사람의 힘으로 조성됐다고 믿기지 않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생명의 정원이 됐다.
천리포수목원은 오래 전부터 세계 여러 관련 학회와 유명 수목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2000년에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세계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됐다.
또 미국호랑가시학회가 공인한 호랑가시수목원으로 선정됐다.
미국호랑가시학회는 대저택이나 장원을 가진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배타적으로 운영하는 단체.
이 단체가 미국 밖의 다른 나라 수목원에 인증패를 준 경우는 프랑스에 이어 천리포수목원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병갈은 2001년에는 임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천리포수목원은 15년에 걸쳐 땅을 조금씩 매입한 탓에 흩어져 있고 7개구역으로 나뉜다.
본원 2만평만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다. 나머지 낭새섬, 목련원, 침엽수원, 사구지역, 큰골, 기타지역 등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나무들의 천국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는 사람도 키웠다. 수목원 조성 초기였다. 해변을 산책하던 민병갈은 주말마다 모래밭에 앉아 책을 읽는 소년을 보았다.
민병갈은 영리해 보이는 그 소년이 가슴에 품고 있던 열정을 알아챘다.
그 소년은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소년이 열아홉이 됐을 때 민병갈은 그에게 수목원의 잡일을 줬다.
그 소년은 일을 빨리 익혔고 남는 시간에는 혼자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 소년 김군소는 민병갈의 도움으로 미국 델라웨어 대학을 졸업했다.
현재는 미국 모턴수목원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민병갈의 원래 이름은 칼 밀러(Carl Miller). 해방 직후 미군 중위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첫 7개월 동안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한국인의 순박한 모습에 흠뻑 빠져든다.
이듬해 군복을 벗고 한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한 끝에 미 군정청 정책고문관으로 지원해 이 땅에 남았다.
천리포 땅과 인연을 맺고 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했다.
그는 2002년 숨을 거뒀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목원 안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혔다. 다음은 묘비명의 마지막 구절.
푸른 눈의 영원한 한국인 민병갈이 남긴 천리포수목원은 앞으로 천년을 두고 푸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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